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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나의 자본가에 대한 이해

먼저 확실히 할 게 있다. 투기꾼들이나 빌딩 부자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금본위제 폐지 이후 종이쪼가리로 전락한, 그나마도 대부분은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돈을 갖고 불특정 다수를 우롱하며 이익을 챙긴다. 그들이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실질적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라 할 수 없으며 사회에 유의미한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대상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며 해고하고 그들과 대립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자본가에 대해 말할 것이다.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은 자본가는 노동자의 적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하는 ‘경영’은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영이 노동이 아닐까? 사회주의에서는 그런 노동이 없을까? 있다. 노동자 모두가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정하지만 일의 효율성을 위해 경영을 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 평균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지 않을 것이며 이들도 경영이라는 노동을 하는 수많은 노동자 중 하나일 것이다(물론 지금 자본가들이 하는 것은 경영이라는 이름 아래 착취와 탄압이 병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그러지 않고서 경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이 이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 다르게 만들었는가? 생산수단의 독점이다. 그것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 정보, 권력의 불균형이 이 노동자들에게 독점적인 위치를 누리게 했고 자본가라는 이름을 달게 했다. 나머지 노동자들은 그저 할당된 일들을 하고 단편화돼 서로 멀어져 갔다.

무엇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생산수단의 공유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다.

역할 놀이

모두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들어봤을 것이다. 연구팀은 70명의 지원자 중 24명을 선발했다. 그들은 아주 평범했고 중산층 출신이었으며 심지어 대학교육도 받은 청년들이었다. 실험은 그들에게 죄수와 간수의 역할을 맡겼다. 실험은 눈 깜짝할 새에 통제 범위를 벗어났다. 교도관들에게서 굴욕적인 대우와 가학적인 행위를 받은 수감자들은 괴로워했으며 그 행위들은 용인됐다. 실험이 끝날 때까지 [실험 참가자들에게] 심각한 감정적 혼란이 일어났고, 2주로 예정됐던 실험은 결국 6일 만에 끝났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을 실감할 수 있는 실험이다.

마찬가지로 자본가, 노동자들도 결국 그들의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감옥안에서. 한쪽은 어떻게 하면 더 착취하고 분열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다른 한편에선 연대와 투쟁을 이루려 노력한다. 처절하게 때로는 희망차게.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이 세상은 다 무대다. 세상 남녀는 그저 배우이며 등장도 하고 퇴장도 한다. 우리는 하루하루 상사 놀이, 부모 놀이, 선배 놀이 같은 역할 놀이를 하며 살아간다. 이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자기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배우들일 뿐이다. 물론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능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바꿔 나가는 배우들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없다. 자본가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본가가 된 것이 그들의 죄인가? 확실히 그것은 죄가 아니다. 우리가 노동자의 집안에 태어나길 선택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자본가 집안에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죄가 없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상황과 역할을 핑계로 면죄부를 준다면 그들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면이 아닌 정상참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감옥 실험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이다. 자본가들은 간수가 돼 버린 노동자다. 감옥 안에 있는 한, 죄수와 간수가 피터지는 싸움은 결국 끝나지 않는다. 싸움을 계속 할 대역들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문제의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집에 물이 새는데 물만 퍼낸다고 해결이 되지는 않는다. 물이 새지 않게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자본주의라는 감옥을 부수는 것이 본질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단지 대차대조표의 항목 중 하나일 뿐이며, 사랑 같은 고귀한 감정은 물건을 팔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모든 가치와 생명들이 돈으로 치환되며 자본의 자기확장을 위해 이용된다. 이 감옥을 운영하는 자본가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대부분이 무감각해졌으며 설사 도덕적인 개인 자본가가 있더라도 혼자서는 전체 시스템을 뒤집을 수는 없다. 그 일은 노동자의 손에 달려 있다.

이 역할극은 산업혁명 때 생긴 것이다. 유물론에 입각해 보자면, 새로운 생산양식이 등장함에 따라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과학기술과 물질적 풍요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만큼 충분히 발전했다. 지금은 과도기적인 상황이며 계급 간 모순은 극에 달해 있다. 시대는 이제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더 나은, 업데이트된 역할 놀이를 원한다. 사회주의를 원한다. 사회주의자들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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